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혁명 전쟁 (문단 편집) ====== 1793년 말, 툴롱 반란(나폴레옹의 등장) ====== 그러던 와중에 [[툴롱]]의 왕당파가 이러한 틈을 비집고 다른 혁명파들을 죄다 쫓아내버리고 [[영국군]]과 [[스페인군]]을 받아들이자, 이것은 공화국에 있어 상당한 타격이 되었다. 툴롱은 [[프랑스 해군]]의 [[지중해]] 기지였는데, 그곳을 빼앗긴다는 의미는 사실상 제해권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의미와 비슷했다. 결국 공안위원회에서는 라 발레트 두 바를 함락시킨 장 프랑수아 카르토와 장 프랑수아 코르누 드라푸아프(Jean François Cornu de La Poype)[* 귀족 장교 숙청 당시 공화파를 지지해서 살아남았다.]를 사령관으로 해서 툴롱을 다시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.[* 이때 나폴레옹도 툴롱 공방전에 포병 대위의 자격으로 참가하게 된다.] '''그러나...''' 카르토는 군인이 아닌 캔버스와 붓만 잡던 화가였고, 그런 주제에 공동 사령관이었던 드라푸아프와는 전선의 지휘권을 두고 알력다툼을 하느라(…) 정신이 없었다. 카르토 같은 이가 군대의 고위장교로 있던 탓에 [[프랑스군]]은 툴롱에 주둔해 있던 대프랑스 동맹군보다 거의 두세 배나 많았음에도 절대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.[* 나폴레옹은 거듭 상관인 카르토에게 작전을 입안하여 신청했지만 무능한 카르토는 "일개 '''포병 대위'''가 하는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"며 시원스럽게 나폴레옹의 작전을 씹었다(…). 그리고 오로지 무한 닥돌로 병사들의 희생만 잔뜩 늘리고 있었다...] 전과가 시원찮자, 11월 11일, 공안위원회에서는 카르토를 자르고 도페라는 이름의 장군을 보냈는데, 이 사람은 카르토만큼이나 군대와는 거리가 먼 의사 양반이었다(…). 아니 그뿐이면 모를까[* 의외로 뒷배경이 이런데 출세한 사람들이 혁명기에 꽤 됐었다.] 이 자가 피만 보면 식겁을 하는 피 [[공포증]]이 있다는 것.[* 사실 내과 의사였다.] 때마침 영국군의 산탄포가 미처 준비되지 못했을 때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돌격할 때에 의사 양반의 호위대가 영국군의 포격 한 발에 사람 좀 죽자 도페는 식겁하며 철수 명령을 내렸다.[* 이때 청년 대위 나폴레옹은 대놓고 도페에게 나아가 "후퇴 명령을 내린 --잉여-- 얼간이가 당신이오?" 라고 물었는데 도페는 무서워서 감히 뭐라 하질 못했다고.(...)] 결국 --잉여--도페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자, 결국 그 대신에 뒤고미에 장군이 지휘관에 임명되었다. 실전파였던 뒤고미에가 이끄는 혁명군은 12월 18일 결국 툴롱을 함락시켰다. 그리고 그 덕분인지 그해 마지막에 군대는 더욱 증강되었고, 침략자를 격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는 한층 레벨을 올려서 더욱 더 많은 '''반혁명분자'''(라 쓰고 정적이라 읽는다)들을 색출, 대거 참살하는 쾌거를 이룩했다(…)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